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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커플링] 짧은 삶

9번째로 죽기 전에 닥터가 생각한 것

시즌 1부터 EOT까지의 스포 O

제가 생각하고 있는 닥터의 캐릭터성을 풀어 헤친 것입니다... 뇌피셜 파티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0. 


Doomsday 

[명사] (기독교에서 말하는) 최후의 심판일



1.


"그래, 아무래도 여기가 문제인 거 같네."

그는 단순하게 생긴 망치로 콘솔을 두드리며 원통 모양의 중심을 바라보았다. 연두색의 유리 안으로는 엔진이 가동되는 중이라는 표시처럼 세개의 플라스틱 기둥이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지구에서 3광년 떨어진 곳에서 타디스를 고치고 다시 망가뜨리고 있다. 마치 꼬꼬마 범생이가 시계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해 처음처럼 작동하는 바퀴들을 보고 자부심을 느끼는 듯한 행동이었지만 그곳엔 따뜻한 온기마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타디스만이 웅웅거리며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엔진과 엉켜있는 전선의 난잡함을 바라보며 닥터는 허리를 구부리고 앉았다. 망치와 소닉 스크류 드라이버가 타디스의 위에서 굴러다녔다. 그는 그것을 붙잡아 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는 심판이 내려지고 나서 우주를 정처없이 떠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당한 재판의 결과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목이 매여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과거의 닥터가 저지른 행동은 용서될 수 없다. 개시할 수 있는 허가를 받는 행동이 아니었고 어느 누구도 처벌할 권리를 가지지 못하는 행동이었다. 닥터는 혼란스러운 전시 상황을 영원히 멈춘 대가로 끔찍한 평화를 가지게 되었다. 결국 끝끝내 마지막까지 미루어질 것만 같던 심판이 내려졌고 그는 조각조각난 마음을 들고 도망치고 있다. 두 상황 모두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미화될 수 있지 않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슬펐다. 그는 잠시 망치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는다. 

로즈를 잃는 것은 그의 책임이 있었고 그것을 저버렸지만, 닥터라는 이름 안에서는 조금의 죗값을 치룬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죄책감과 후련함의 연관성을 이어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행성 단위의 도움을 주며 은하에서 은하를 떠돌고 있던 것이었다. 로즈를 잃었음에도(혹은 로즈를 잃어서) 닥터는 여전히 그것을 인생의 숙명이자 죄명처럼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닥터는 항상 누군가를 데리고 다녔다. 컴패니언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오직 닥터라는 개인에게만 내려진 저주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 나눠 짊어지는 것은 잔인하다. 

하지만 이 부분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 닥터도 외로움을 겪기 때문이었다. 그는 특히나 더 그랬다. 자신의 곁에 누군가가 없으면 불안감을 느끼고 매달리게 되듯이 그는 누군가와 함께 시공간을 여행하며 생명을 돕는 것을 낙으로 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멋진 여행이 그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그리고 그에겐 절체절명의 순간에 도움을 주는 사람에서 나아가 타디스에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문득 그는 도나가 했던 말에 대해 생각한다. 타디스가 만들어낸 눈이 하늘에서 쏟아지고 두 사람은 눈을 맞으며 서 있었으니 누가 보면 우스울 광경이었지만 닥터는 도나가 말했던 몇 문장을 잊지 못한다. 시간 여행을 하며 감각이 둔해진 닥터는 며칠이 지났는지 계산하는 것을 그만두고 다시 일어나 콘솔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허리를 숙여 엉망으로 엉켜있는 전선과 엔진의 부속 전원을 끌어올려 콘솔 위에 올려두었다.

다른 사람을 찾아.

당신에겐 멈춰줄 사람이 필요한 것 같아. 

그 말은 그에게 꽤나 환상적이었다. 우주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자신을 꿰뚫는 듯한 문장에 그는 눈바람보다 슬픈 감정을 느꼈다. 또한, 그를 멈춰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과는 별개로 그는 곁에 누군가를 오래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과거와 상황이 그렇게 놔두질 않았다. (빌어먹을!)

닥터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사람이었다. 

혼자서도 괜찮아. 

몇 번이고 반복했던 말에 도나는 웃음 지으며 뒤돌아 섰다. 타디스 문을 닫고 다시 혼자가 될 준비를 시작하려던 닥터는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도나의 목소리에 타디스 문을 열고 이번엔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그 옛날 친구, 이름이 뭐였어?

⋯로즈, 걔 이름은 로즈였어.

눈바람보다 슬픈 감정. 

아마 그것은 사랑의 부작용인 것이라, 영원토록 사는 그에겐 평생 잊혀지지 않을 순간이었다. 

한 달이 지났다.



2.


아무런 위협이 도사리지 않는 날에 그는 가끔씩 사랑의 본명을 불러보곤 했다.

로즈 타일러.

한가하게 감자 튀김이나 먹으면서.



3.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그는 정신적으로 시름시름 말라가 죽어가고 있는 참에 고향에서의 충격적인 기습을 받았다. 많은 눈물과 죽음이 그를 바람 앞의 불꽃처럼 점점 사그라들게 하고 있었다. 아마 그의 정신 상태를 비유하기 가장 좋은 것은 8월의 땡볕에서 말린 장미 한 송이일 것이다. 

아마 그는 죄책감을 잊어버리는 순간을 가장 두려워했을 것이다. 정체성이 사라지는 기분에 닥터는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옷장 옆에 누웠다. 방사능을 이루고 있는 원자 기호들이 눈 앞에서 흐물흐물거리며 녹아내렸다. 까무잡잡한 가죽 자켓을 집어 던지고 우스운 베이지 코트를 집어들었던 곳에서 그는 쓰러져 잠시 생각한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그리워질 것 같다. 

우드는 닥터의 이야기는 이어질 것이라 했지만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그는 죄책감으로 똘똘 뭉쳐 만들어졌다. 전쟁을 멈춘 사람은 환호성을 받아야 마련이지만 만약 그가 저지른 짓을 알게 된다면 모두들 뒷걸음질을 치거나 총구를 겨눴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생명이다. 게다가 무너지는 순간이 수도 없이 많은 삶을 살고 있단 점은 심장의 갯수보다 훨씬 인간을 닮아있다. 그리고 그에게서 떨어져 나와 무너진 조각들은 각자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그의 처음 조각은 로즈였다. 지금의 모습이 되기 이전에 만난 첫번째 컴패니언이자 첫번째 사랑. 우주에 금이 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다. 

두번째 조각은 마사. 로즈를 잃고서는 그가 너무 많은 상처를 준 사람. 하지만 이제 되돌릴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녀에겐 미안함 뿐이다. 

세번째 조각은 도나. 빨간 머리의 강인하고 멋진 사람. 그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그녀의 기억을 가져갔다. 아마 그녀를 동경했을지도 모른다. 빨간 머리 말고. 

모든 조각들이 무너져 내렸지만 하나하나 아름다운 단면을 빛내며 그의 기억을 채우고 있었다. 물론 그는 죽기 싫었다. 기억을 모두 잃어버리는 대가로 지금 이 모습을 유지하는 거래가 있다면 한 번쯤 생각해 볼만 하다. 그는 죽음이 두려웠다. 죽은 후에 그 기억을 가진 채로 다른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번 지치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왜냐면, 새 몸이니까.) 죽음은 아무리 반복해도 적응되지 않는 일이다. 

그는 사실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러 와 주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무기질로 이루어진 몸을 가지지 않은 이상은 계속해서 생각을 하기 마련이고 그러면 자꾸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억울한 악순환이다. 멈출 방법은 오직 죽음이었고 그러기 위해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도 살아있는 유기체라 또다른 유기체와 자꾸만 접촉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고 나아간다. 그렇게 죽음의 기회는 날아갔다.

그 후 그들을 보호하면서 닥터는 자신을 알고 보호하는 것이 그들을 위하는 것임을 알게되었다. 그러나 앞으로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새로운 몸에서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지구를 사랑하고 지구의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그들과의 인연을 쌓고 부수고 흐드러뜨리는 것이 그에겐 익숙하면서 익숙치 않았다. 매번 새로운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익숙치 않는 것 마냥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무슨 수가 있으랴, 그는 그들을 정말 사랑했다. 

세 명, 그 뒤에 딸려오는 사람들도 하나하나 생각해보기로 했다. 푸르른, 남색과 주황색, 하늘을 닮은 사람들을.

아마 나중에 더 시간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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